딸아이가 직장을 옮기는 틈새에 말미를 얻어 가족 여행을 급하게 계획했다. 무비자이며 한국에서 가까운 대만을 택했다. 타이페이(臺北)의 관문인 타오위엔(桃園)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풍광우일신(風光又一新)”이라고 휘갈겨 쓴 커다란 세예 작품이 공항 대청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대만 관광청에서는 국제관광진흥책으로 ‘여행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착해서 알았다. 대만달러 5,000원(한국돈 20여만 원 상당)의 전자 바우처 내지 숙박 할인쿠폰을 24시간 이전에 신청한 여행객이 공항 도착시 추첨을 통해 교부한다는 내용이다. 당첨됐다는 한국 관광객들을 여행 기간 동안에 여럿 만나고는 챙기지 못한 것이 살짝 아쉬웠다. 그러나 대만의 일신된 면모는 의외의 장소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얼얼바(二二八) 평화 기념 공원’을 방문해서 위령탑과 화해 촉구의 기념문을 보고는 우리 제주 4.3사건과 평화공원을 아프게 떠올렸다. 그리고 공원 전면에 위치한 국립대만박물관에서는 중국이 아닌 대만의 역사와 자연사를 관람했다. 대만 원주민들의 생활 유품관을 지나자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그린 수채화 풍의 <타이욘(Taioan)>을 모사한 체험형 전자지도 시뮤레이숀이 전시되어…
옥 같은 이슬은 영롱하여 가을빛은 서늘한데(玉露團團秋色凉) 가을바람이 몇몇 가지에 노란 꽃을 터트렸네(金風折盡數條黃) 떨어진 꽃부리는 벌써 영균의 찬에 들어갔고(落英曾入靈均餐) 한 움큼 잡은 것 이미 팽택의 술잔에 떠 있네(盈把已浮彭澤觴)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이 시는 도연명의 국화사랑과 연관시켜 읊은 것으로 찬 서리에 굽히지 않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가을 국화에 숨어사는 자신을 투영하였다. 가을 국화는 차가운 서리 발에도 견디며 시들어도 끝까지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서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일컫는다. ‘기다림’, 이는 생각만 해도 다가올 미래에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가. 현재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며 환희와 기쁨을 그리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아니던가. 봄꽃들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견디며 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앞 다퉈 피는 장관을 연출한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봄을 모른 척하다가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피는 국화는 그 누구를 기다리는가?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를 기다림 그 자체로 표현했다. 소쩍새가 울며 기다렸고, 또 그렇게 천둥이 기다렸고, 끝 모를 그리움으로 잠도 아니
오늘날 동아시아는 여러모로 세계사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듯한 외교적 움직임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지구 이해득실의 전선이 첨예하게 충돌할 듯한 조짐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움직임은 20세기 냉전 대결이 재발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까? 17세기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한반도의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여러 차례 국제전에 연루되고 싸움터를 내주어야만 했다. 국내적으로는 16세기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전후 수습책을 지속했어야만 했지만, 유교적 명분을 내세운 구테타에 의해 정권이 바뀌고 중국 북방의 신흥국가 후금 혹은 청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 시기 4명의 조선 문인들은 <산군전>이라는 우언 작품을 연달아 창작했다. 산중 통치자가 되기까지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산군이 되고 나서도 권한과 책임에 따르는 명암이 심하게 엇갈렸다. 범의 등극은 이마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절륜한 용맹함 덕분이지만, 권력의 자리에는 이미 사나움과 잔인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나름의 교훈을 찾을 수 있어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중세 질서가
안성은 편안하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맞춤 그대로 소통하게 한다. 먼저 고객의 손과 발에 맞추어 불편함이 없게 하고 그다음 눈에 들게 하여 기분을 맞추고, 마음에 들게 하여 행복을 맞추어 준다. 손과 발이 유별나게 열정적인 안성사람들은 안성맞춤의 원조인 안성유기를 만들었고, 쌀농사를 잘 지어 전국 최고의 밥맛을 자랑하고 그 쌀로 술을 담그니 최고의 막걸리가 나왔다. 요즈음 안성은 바우덕이의 줄타기로 관광객의 마음을 맞추고, 안성의 유기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안성의 막걸리와 쌀밥은 팔도사람의 입맛을 맞춘다. 옛날 안성은 지형적으로 삼남(三南)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으로 4세기 이전에는 백제지역, 5세기에는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며, 6세기에 신라가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는 등 삼국, 후삼국의 모퉁이에서 전쟁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또 안성 주변은 산이 깊어 수많은 도적들의 은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도적들이 칠장사 샘물을 마실 때는 분명 금 바가지였지만 소굴로 가져가면 박 바가지였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바가지에도 탐욕이 앞서니 도적의 욕심을 불심으로 바꾼 혜소국사의 신통력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지루한 장마도, 뜨거운 불볕도 한풀 꺾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잊고 지낸 어린 날의 동요인양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고향의 부모님은 잘 지내시는지? 빌딩사이로 초라하게 내민 둥근달은 자식에게 폐를 끼칠까 봐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 쳐다보기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군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되길 저 달님에게 얼마나 빌고 비셨을까? 달은 우리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고, 쉬어가게 하는 어머니 같다. 태양이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엄한 아버지를 상징한다면, 달은 보수적이고 과거지향적인 자애로운 어머니의 성품을 지녔다. 불가(佛家)에서는 달을 “달빛은 두루 중생에게 비추어 재앙을 쉬게 하는 보살(月光遍照 息災菩薩)”이라하였다. 이렇듯 달은 자식들을 감싸주고 편히 쉬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에 보면 추석이 시작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경주의 6부(部)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고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다가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이르러 헤어지곤 하였
범을 점잖게 ‘산군(山君)’이라 부른다. 산속 임금이라는 뜻에서 범을 가장 높혀 부르는 호칭일 것이다. 16세기 명나라 강남의 문인 왕치등(王穉登)은 『호원(虎苑)』을 편찬하면서 일곱 번째 「위맹(威猛)」편을 두었다. 길짐승 최상위 포식자인 범의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모습이나 이야기를 모았다. 찬사(讚辭)에서도 이른바 ‘산군’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심상을 그리면서 ‘왕의 DNA’가 어떤 것인지 나타냈다. 그러나 남성성을 찬미하는 듯한 가부장적 가치관이 투영된 이야기도 있어 자연세계와 동떨어진 인간문화의 편향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우선 몇 대목 인용하면서 음미해 보기로 한다. ○ 범은 아이를 먹지 않는다. 아이는 어리숙해서 범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잡아먹을 수가 없다. 아울러 취한 사람을 먹지 않는다. 반드시 깨어나기를 기다려 비로소 잡아먹는다. 사실 깨어남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두려워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 범은 개를 먹으면 취하니 개는 범의 술이다. ○ 범은 구부러진 길을 가지 않는다. 범을 만난 사람이 구비진 길로 유인해 가면 피해 갈 수 있다. ○ 범이 굶주리면 과실 열매를 씹어먹기도 하니 짐승만 고집하진 않는다. 그런데 사람을 먹을 때면 남
창호지 하나로 세상을 가리지만 방안 가득 햇살을 머물게 하고 보름달과 함께 한 이불 덮고 옛정을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창호이다. 호랑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가게 한 곳이 초가집 창호 밑이다. 한국의 집에 설치된 창호는 창(窓)과 호(戶)로 구분된다. 엄밀히 따진다면 창은 햇빛과 바람을 방안에 들이기 위한 구조물이고, 호는 사람이 방에 출입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이지만 창호라는 이름으로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나 서양의 경우에는 ‘door'와 ’window'는 완전히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의 창호는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단순히 방안 출입의 기능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창호에는 한국인의 염원을 표출하고 있다. 그래서 창호의 이름도 다양하다. 먼저 그 기능적인 면으로 창호를 분류하면 여닫이, 마당이, 들어열개 등으로 다양하다. 여닫이는 문틀에 돌쩌귀를 박아 창호를 바깥쪽으로 당겨서 열개하는 밖 여닫이가 대부분이다. 이 여닫이 안쪽에는 이중의 창호를 설치하여 추위와 비바람을 막게 하는 미닫이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미닫이는 문틀을 짤 때 가로로 아래
“무는 호랑이는 뿔이 없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범이 무용을 자랑해도 권위의 상징인 뿔은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뿔 짐승은 송곳니가 없다. 초식동물이라 그렇다. 사자성어로 ‘각자무치(角者無齒)’라 한다. 《여씨춘추》에서는 몇 가지 예를 더 들었다. 열매가 많은 나무는 키가 크지 못한다. 이를 사람에게 비유한다면? 모든 것에서 지혜롭고자 하는 자는 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하늘이 이치이다. 이 책은 진시황의 진(秦)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여불위(呂不韋)의 주도 아래 제왕의 통치술을 위한 백과사전으로 편찬된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학자의 입장은 다르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뜻을 널리 가져서 갖가지 지혜를 추구하는 지식 전문가를 만나고, 일의 선후를 따지고 마지막으로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호사》 저작자였던 이서우(李瑞雨)의 <우언> 한 편을 음미해 본다. 표범이 조물주에게 여쭈었다. “신이 사람에게 잡히는 이유는 털가죽이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털 벗긴 가죽으로는 사람이 겨울을 날 수도 없습니다. 청컨대 양과 바꿔 주십시오.” 조물주는 표범에게 “좋다”고 하고는 양을 불러서 말했다. 양이 이르기를, “신은 고기가 맛
속담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무더위로 인한 힘든 마음을 여름 모기에 빗대어 더위도 한풀 꺾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건강하게 지내고자 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불러 힘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만 생각하여 집 안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냉방기를 가동하여 시원함을 느끼나 이것은 이내 감기에 걸리기 쉬운 여름나기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옛 조상들의 여름 나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멋짐이 있었다. 시원함을 즐기기 위해서 우선 서늘한 그늘을 찾아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자리를 깔았다. 집 안에서는 모든 창문을 열어젖혀 사방을 트이게 해 자연의 바람이 통과하길 기다렸다. 그래도 바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커다란 부채를 설렁설렁 흔들어 여유롭게 땀을 식히며 바람이 들어오길 기다리곤 했다. 옛날 말에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 팔아 첩을 사서 동짓날 긴긴밤을 첩과 함께 지냈건만, 오뉴월이 돌아오니 첩을 팔아 부채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죽하면 오뉴월 삼복더위에 가족을 팔까? 추위는 견딜 수 있다지만 더위는 견디기 힘들다는 역설적인 노래로 부채의 소중함
역사는 동아시아 문명권의 특징을 대표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 대한 최종심으로 여겨진다. 전통 시대의 역사는 통치자의 말[言]과 일[事]을 기록하면서 속뜻을 밝히고 시대를 평가해 왔. 서구 문명권에서 역사(historia)는 사건의 기술이자 이야기일 뿐이며 그에 대한 최종적 가치 판단은 종교의 영역이었다. 이야기가 소설로 발달하면서 동아시아는 역사를 가장하지만 유럽은 고백록을 연원으로 삼는다. 동아시아인은 신의 이름을 걸기보다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범의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은 어떤 속뜻을 지닌 것인가? 다음 서문은 ‘역사’의 내력과 의미를 곡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사(史)’란 왕의 관리로서 그 말과 일의 찬술을 맡는 직책이다. 세상에 대단한 변론과 지식을 지닌 선비들은 제 능력을 자부하지만 사관의 붓대를 얻어 시대의 전범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반드시 마음이 근질거려 덮어둘 수가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만물의 실상을 캐고 소설 더미를 들춰내어 글을 만들면서 ‘사(史)’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러한 경우 반드시 사관의 직책이 아닐지라도 누구나 역사를 집필할 수 있고, 제왕의 일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물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