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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서 칼럼니스트

부모 형제가 생각나게 하는 홍시

흔히들 아는 이야기지만 옛말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란 말이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호랑이가 많았다. “조선 사람은 일 년의 반은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또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호랑이가 오건말건 울며 때를 써서 먹고 싶은 곶감을 먹고 호랑이도 물리쳤으니 일석이조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감은 겨울철 감기 예방에 최고의 약이였다. 약이 귀했던 시절 곶감은 비타민이 풍부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감기를 물리치는 존재였다. 감에 들어있는 카로티노이드는 비타민 A로 전환되고, 비타민 C 역할을 하는 아스코르브산은 감귤의 약 2배 정도 된다니 겨우내 두고두고 먹는 종합 비티민이 되었던 셈이다. 요즘처럼 제철 과일이 철모르는 과일에게 자리를 빼앗긴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겨울 밤 곶감 한 입 베어 물고 그 달콤함을 생각해보면 문지방 밑에서 곶감 이야기를 듣던 호랑이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감은 익은 상태와 가공방법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진다. 익은 상태에 따라 감을 빨리 먹기 위해 익지 않은 땡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뺀 침시(沈柿), 잘 익어 먹기에 딱 좋은 연시(軟柿), 단맛은 최고이나 물러 터지기 직전의 붉은 감인 홍시(紅柿)등이 있다. 또 감을 깎아 꼬챙이에 꽂아 볕에 말린 건시(乾柿)가 곶감으로 꼬챙이의 ‘곶’과 ‘감’이 결합된 형태로 꽂아 말린 감을 말한다. 꼬챙이에 꿰지 않고 납작하게 눌러 검은 자루 속에 넣어 말린 것을 준시(蹲柹)라 하는데 이때 흰 가루분이 나서 백시(白柿)라 한다. 요즈음은 아이스크림 대용으로 인기가 있는 냉동시(冷凍柿)등 하나의 과일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또 감을 먹으면 변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떫은 감을 먹었을 때 해당 된다. 그러나 떫은맛을 내는 타닌이 감이 익어감에 따라 수용성에서 불용성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홍시나 곶감은 먹어도 변비가 생기지 않는다.

 

 

옛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담장아래 감나무를 심어서 마당 곁에 두고 ‘칠절당(七絶堂)’이라 예찬하였다. 칠절은 곧 감의 뛰어난 일곱 가지 덕(德)을 말하는데 《본초 권30 과부 시(本草 卷30 果部 柿)》에서 “감나무는 첫째 수명이 길고, 둘째 잎이 풍성하여 그늘이 많으며, 셋째 새의 둥지가 없다. 넷째 벌레가 없으며, 다섯째 단풍 든 잎이 아름다우며, 여섯째 풍성한 열매가 먹음직스럽고, 일곱째 낙엽이 두껍고 커서 글씨를 쓰기에도 좋다”고 하였다. 또 붉은 감을 자규란(赭叫卵)이라 하여 붉은 용(龍)의 알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홍시의 진액을 도사들이 즐겨먹는 영액(靈液)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옥담 이응희(李應禧,1579~1651)는 감의 칠절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담장 위에 좋은 감이 달려 있으니(墻頭有好柹)

다른 과일과 견줄 수가 없네 그려(百果類無同)

반질반질한 잎은 글씨 쓰기가 좋고(沃葉堪書字)

시원한 그늘은 가히 몸을 쉬기 좋네(淸陰可息躬)

 

벌어진 꽃은 비에 젖어 더욱 희고(疎花蒙雨白)

둥근 열매는 서리 맞아 붉어졌는데(圓果帶霜紅)

대추를 어느 누가 낫다고 말하였나(羊棗誰偏喫)

달고도 단맛은 이것 보다 아래라네(甘濃在下風)

 

예부터 감은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과일로 표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사립학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조선중기 학자 주세붕은 아버지가 홍시를 즐겼으므로 자신은 종신토록 차마 홍시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노계 박인로는 한음 이덕형이 소반에 담아 준 홍시를 보고 “반중조홍(盤中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다 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다마 품어 가 반기리 업슬 글노 설워이다.”란 조홍시가(早紅柹歌)를 지어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홍시를 드릴 수 없음을 슬퍼하였다.

 

 

조선의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은 형 황치신의 집 울타리의 감을 따와 형을 청해 접대하며 “다행히 일찍 익은 홍시를 얻었기에 형님과 더불어 맛보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형이 달게 먹고는 “너는 후일에도 다시 이와 같이하라” 하고 집에 돌아오니 감나무의 홍시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내가 동생 꾀에 속았구나.”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이런 형제의 우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며 형 황치신을 불러 술을 하사하고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하였다고 하니, 감은 벼슬길도 열어주는 특별한 과일임에 틀림없다.

 

또 곶감이 꿰어진 것을 학문의 완성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조호익은 박대암에게 곶감을 보내며 “우연히 곶감 한 속(束)을 얻었기에 보내네. 곶감은 열 개를 한 꼬치, 열 꼬치를 한 속이라하는데, 이것을 고명(高明)의 학문에 비유한다면, 각각의 사물마다 한 이치가 있고, 한 이치로써 만 가지 이치를 알아서 능히 하나로 꿰는 경지에 나아간 것이라네. 사물이 미천하지만 비유는 깊다네. 받아 주기 바라네.”했다. 이와 더불어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은 “주렁주렁 수많은 열매들이 그리운 고향 생각 일으키네.”하였으며, 서거정은 “홍시를 입속을 기쁘게 하여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 했다. 김종직은 “집집마다 칠절당이 있어 천호(千戶)의 제후 (諸侯)에 봉해진 것보다 낮다”하여 감나무는 제후와 바꾸지 않을 만큼 귀한 것이고, 홍시는 고기보다 맛있다고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올망졸망 매달린 감은 부모형제가 그리워진다고 하였다. 어느 가수는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고 홍시를 열창하기도 했다.

 

홍시는 특히 병자호란 때 포로송환에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인조 6년(1628년) 1월 6일 실록에 “청에 포로가 된 사람들이 6백여 명이 되는데 포로를 쇄환(刷還)할 때 호차(胡差)들이 누차 과일을 요구하였는데 제일 귀한 것이 홍시라고 합니다. 넉넉하게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여 홍시는 붙잡혀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곶감과 홍시의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증정교린지》에 잡물(雜物)을 쌀로 바꾸는 법식이 있는데, 곶감 1첩을 쌀 1말 5되, 홍시 1개를 쌀 8홉으로 계산하였으니 쌀보다 비싼 과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조상들의 인심은 비싸고 귀하다고 혼자만 먹지 않았다. 겨울 감나무 높다란 가지위에 남겨둔 까치밥의 미덕은 내가 어려워도 더불어 사는 이치를 일러주어 항상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곶감 항아리와 마주할 때 우는 아이도 웃고, 호랑이도 웃는 그리운 사람이 그리워 질 것이다. 곶감처럼 달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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