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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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서 칼럼니스트

부채로 여름 나기

속담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다. 무더위로 인한 힘든 마음을 여름 모기에 빗대어 더위도 한풀 꺾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건강하게 지내고자 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불러 힘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만 생각하여 집 안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냉방기를 가동하여 시원함을 느끼나 이것은 이내 감기에 걸리기 쉬운 여름나기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옛 조상들의 여름 나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멋짐이 있었다. 시원함을 즐기기 위해서 우선 서늘한 그늘을 찾아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자리를 깔았다. 집 안에서는 모든 창문을 열어젖혀 사방을 트이게 해 자연의 바람이 통과하길 기다렸다. 그래도 바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커다란 부채를 설렁설렁 흔들어 여유롭게 땀을 식히며 바람이 들어오길 기다리곤 했다.

 

 

옛날 말에 "가을에 추수하여 곡식 팔아 첩을 사서 동짓날 긴긴밤을 첩과 함께 지냈건만, 오뉴월이 돌아오니 첩을 팔아 부채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죽하면 오뉴월 삼복더위에 가족을 팔까? 추위는 견딜 수 있다지만 더위는 견디기 힘들다는 역설적인 노래로 부채의 소중함을 말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채에 이런 글을 적어 두어 시원한 바람, 즉 부채는 대나무와 한지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재미난 생각을 했다.

 

紙與竹相婚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좋아 혼인하니

生其子淸風 그 자식으로 태어난 이가 맑은 바람

 

또 풍성한 모시나 삼베옷에 팔토시, 등토시를 끼워 시원한 여름옷일망정 살갗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하는 과학적인 옷 입기를 하였다.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 요즘의 냉방기는 저리가라였다. 감기에 걸릴 염려도 없고, 비싼 돈 써가며 전기료 폭탄 맞을 일도 없으니 그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금상첨화라고 했던가? 찬 우물에 담가둔 수박이라도 쩍 갈라서 먹으면 여름 더위는 저만큼 물러가고 말았다.

 

한편 조선의 사상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고봉집(高峯集)』에 실린 시를 생각하면 찌는 무더위도 부채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부채 역시 가을에는 쓸모가 없어질 것 같아 더위도 잠시라는 위안을 준다.

 

題扇 부채에 쓰다

鑠景流空地欲蒸 볕이 녹아 허공으로 흐르니 땅은 찌는 듯하고

午窓揮汗困多蠅 한낮 창가 흘린 땀으로 곤하니 파리가 들끓네

憐渠解引淸風至 그것을 좋아하여 풀어 당겨 맑은 바람 이르니

何必崑崙更踏氷 곤륜에서 다시 얼음을 밟을 필요가 뭐 있겠나

 

團扇生風足 둥근 부채가 내는 바람으로도 족했는데

秋來奈爾何 가을이 오니 당신은 어찌하면 될 거나

爲君多少感 당신 때문에 여러 감회가 일어나는데

寒熱不同科 춥거나 더워지는 것 등급이 달라지네

 

덥다고 짜증 낼 일도 아니고 선풍기, 에어컨만 연신 틀어댈 일도 아니다. 모든 창문을 열어두어 바람의 길을 내고 시원한 베잠방이를 입어보는 건 어떨까. 또 아무리 더워도 한때라 생각하고 여유롭고 한가로이 누워서 부채나 설렁설렁 부치며 달콤한 낮잠을 청해보는 것이야말로 시원한 여름 나기로 안성맞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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